여행을 떠나면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곳에 가면 꼭 봐야 할 풍경이 있고, 놓치면 아쉬울 명소가 있으며, 다녀왔다는 증거처럼 남겨야 할 사진이 있다. 그래서 여행은 설레는 동시에 은근한 압박이 되기도 한다. 쉬러 왔는데도 마음은 계속 다음 일정을 계산한다.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면 손해를 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따라온다.
계획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느껴졌던 여행의 온도, 움직이지 않았기에 더 멀리 닿았던 마음의 이야기. 그 하루가 왜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는지, 그 이유를 천천히 풀어보려 한다.

1. 아무 일정도 없는 하루를 처음으로 허락하게 된 순간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는 늘 바쁘다. 가기 전부터 이미 그 여행은 시작된다. 맛집 리스트를 저장하고 동선을 짜고 꼭 가야 할 명소를 체크한다.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마음은 쉬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압박이 은근히 따라붙는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여행을 오래 해왔다. 하루에 서너 개의 장소를 이동하고 밤에는 사진을 정리하며 다음 날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어느 여행지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몸이 유난히 피곤했던 것도 아니고 일정이 꼬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멈추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날 나는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바람을 느낀 뒤 다시 침대에 앉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하지 않은 채 하루를 시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하루는 이상할 만큼 느리게 흘러갔다. 시계를 보지 않으니 시간은 더 이상 관리 대상이 아니었다. 점심이 되었는지도 모른 채 배가 고파질 때까지 방에 머물렀고, 배가 고파지자 자연스럽게 근처 식당으로 걸어 나갔다. 목적 없이 걷는 길에서는 평소 보지 못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관광지 안내판도 유명한 건물도 아니었지만, 현지 사람들이 평범하게 지나가는 골목과 창문 너머의 생활이 낯설고 신기했다. 시간을 쪼개 쓰지 않자 여행의 온도가 달라졌다. 급하지 않으니 풍경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춘 것이 아니라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그 순간들은 기록하지 않아도 기억에 남았다. 오히려 사진이 없기 때문에 더 선명해진 장면도 있었다. 여행이란 결국 낯선 공간에서 나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마음을 가장 멀리 데려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가장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할 일이 없으니 마음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바쁨에 밀려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조용히 올라왔다. 일상에서 쌓였던 피로와 서운함, 괜히 애써 외면했던 고민들이 여행지의 고요한 오후에 하나씩 정리되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아도 괜찮았다. 굳이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생각이 지나가도록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는 마음에게 주는 긴 휴가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주지 않으니 마음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강하게 남은 이유는 특별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날의 내가 가장 나다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관광을 하지 않는 하루는 이상하게도 여행지의 일상에 더 가까워지게 만든다.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잠시 그곳에 머무는 사람의 시선으로 거리를 바라보게 된다. 현지 사람들이 출근하는 모습, 점심시간에 붐비는 작은 식당, 오후에 조용해지는 상점가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특별한 이벤트는 없지만 그 평범함이 오히려 여행지의 진짜 얼굴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는 여행지와 나 사이의 거리를 줄여주었다.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잠시 함께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하루가 끝났을 때 이곳을 다녀왔다는 느낌보다는 이곳에서 하루를 살았다는 감각이 남았다. 그 감각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3. 기억은 채운 날보다 비운 날에 더 오래 남는다.
돌아와서 여행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유명한 명소도 화려한 음식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하루의 공기와 빛, 그때의 기분이었다. 기억은 의외로 많은 정보를 담은 날보다 여백이 있는 날에 더 오래 머무른다. 빽빽한 일정 속에서는 장면들이 서로를 덮어버리지만, 비어 있는 하루에는 하나의 감정이 온전히 남는다. 그래서 그날의 기억은 흐릿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졌다.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나 예상과 다르게 찾아온다. 계획하지 않았기에, 성과를 따지지 않았기에 그 하루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아무것도 안 한 하루가 여행을 다시 정의하게 만든다. 그날 이후로 여행에 대한 기준이 조금 바뀌었다. 많이 보고 많이 움직이는 여행도 여전히 좋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 역시 여행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은 반드시 특별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특별하지 않은 하루가 여행의 의미를 더 또렷하게 만들어주었다. 낯선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 용기만큼 깊은 기억을 남긴다. 다음 여행에서도 나는 하루쯤은 비워둘 생각이다. 그날이 또다시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안 한 하루는 결국 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했던 하루였고, 그래서 가장 오래 남는 하루가 되었다.